7월의 덥고 습한 날씨와 함께 제 에너지도 축 늘어져버렸습니다. 6월 회고에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구슬이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더욱더 꽉 잡으려고 했어요.
운동도 엄청 열심히 하고, 영어 학원도 다니고, 개별연구도 하고, OTL도 해보려고 했어요. 빈틈없이 다시 열심히 뛰어다니기를 2주 즈음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정말 아니라는 걸요. 정말 이렇게 더 살다간 가을학기에 큰일 날 것만 같았어요.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 영어학원도 다니고 개별연구도 해보는게 맞았지만, 더 이상은 할 수 없을 것만 같았고, 그제서야 다 놓아버렸습니다. 물론 개별연구는 7월 말까지 했어요.
그렇게 2주를 허망하게 보냈습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주구장창 유튜브만 보다가 OTL 찔끔하고, 사이드 플젝 찔끔하고 운동하고 와서 자는 정도였습니다. 완전히 낮과 밤이 바뀐채로 살기도 했습니다. 그저 뭔가를 딱히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점이 포인트였습니다. 뭔가를 딱히 해야할 것이 없는, 하지 않음이 계획되어있는 그 상황. 그게 곧 쉼이었어요.
사람들은 스스로를 언제 자유롭다고 느낄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 때, 주체적으로 살아갈 때 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건 꽤 자유롭지 못합니다. 본인 스스로 주의를 꽤 많이 기울여야하기 때문이에요. ‘내면의 원숭이’를 아시나요? 인간에게는 두 가지 판단 주체가 있다고 합니다. 쉽고 빠른 판단을 원하는 ‘원숭이’와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판단을 하는 ‘사육사’. 하고 싶은게 뭔지 스스로 정의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면의 원숭이를 계속 가둬놔야 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가 지쳤던 포인트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빡세게 달리고, 감정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쏟고 한 것도 있었지만, 스스로를 계속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지쳤던 듯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놓고 싶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원숭이를 계속 가두는 것에 지친 저는 무진장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육사는 동굴에 들어가버렸어요. 그리고 하루 종일 동굴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시청했죠. 자극과 도파민을 즐겼어요. 숏폼을 그렇게 많이 본 게 처음입니다. 사육사는 그저 폰에 메여있어도 된다는 자유감. 주체적이지 않고, 수동적이어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꼈어요. 슬슬 이 정도면 중독이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드는 시점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어요. 분명히 자유로워지고 싶었는데, 유튜브에 붙잡혀 사는 스스로의 모습이 모순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제서야 사육사는 자신이 동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전까지는 동굴로 들어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내 정신을 지배하는 판단 체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무진장 뛰어노는 원숭이를 잡으러 갑니다. 8월은 원숭이 잡으러 다니는 시간이었어요. 그 시간동안 원숭이를 잘 잡았느냐? 아니요. 잘 잡지 못했습니다. 사실 애초에 잡을 생각이 없었어요. 다만 앞으로는 조금은 사이 좋게 지내기로 했습니다. 무조건 가둬놓기보다 가끔은 풀어주고,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사육사는 한 번씩 밖으로 나와서 일을 했어요. 진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시기였거든요. 전자과에서 개별연구를 했는데, 논문을 읽는 순간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아니 이런걸 내가 써야한다고..?’라는 생각이 머리를 휩쓸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걸 내가 써야한다니!’라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2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첫 번째는 ‘내가 흥미가 정말 드는 분야가 아니라면 이렇게 자유로운 대학원 생활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갈고 닦는다는 건 말도 안되는 거구나’란 생각이 일단 들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전문적인 지식, 탐구 역량, 학위 등등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는 대학원생, 제가 읽은 논문을 보며 느낀 점은 스스로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가는 곳이라 생각했어요. 흔히 예체능이라 하죠, 운동선수,예술인들의 스토리들을 보면 정말 한 분야에서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미친듯이 만들어가잖아요. 손흥민 선수나 송민호 등을 떠올리면 그 자체로서 브랜드잖아요. 그걸 학계에서 만드는 곳이 대학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취업시장에서도 비슷한 느낌이겠죠. 1세대 힙합인들은 아무도 그걸 듣지 않았지만, ‘힙합’이라는 장르가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자본적 성취 또한 거대해졌죠. 결국 나눠먹을 파이가 많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나눠먹을 파이가 적은 곳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않은 것처럼 대학원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우리는 나눠먹을 파이가 큰 곳으로 갈 것이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야를 할 것이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하는 것 같아요. 그 2가지가 잘 정렬되있으면 제일 큰 행운이겠죠. 근데 전자를 예측하는 것은 정말 세상의 우연이라 생각합니다. 파이가 큰 것도 있지만, 나눠먹으려는 사람이 많으면 그 목시 적게 돌아가는 법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미래의 수요와 공급을 예측해야한다는 건데, 이게 개별 주식처럼 포트폴리오로 꾸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올인해야하는 대학원이라는 갈림길에서는 이를 예측하고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예기인 것 같습니다. 결국 후자를 선택하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느낀 두 번째 생각이 나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야를 어떻게 알 것이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내가 대학원에서 계속해서 연구를 할 수 있는 원초적인 호기심,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오냐는 것입니다. ‘이런 걸 내가 써야한다고..?’라고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가, 저는 절대로 그 논문에 있는 내용들을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전자과, 그것도 컴퓨터 쪽으로 내가 대학원을 가는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점점 들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깨달은게 있습니다. 바로 내가 ‘배우기 좋아하는 것’과 ‘새로운 것을 궁금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거에요. 컴퓨터 쪽은 ‘배우기 좋아했습니다.’ 어떤 하나를 배우면 논리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매꾸기 위해 궁금증이 생기거나, 전체 중에 일부를 알았으니 온전해지기 위해 배우는 느낌이었어요. 굳이 비유하자면 시험 공부를 하는데 전부 알고 쳐야할 거 같은 느낌이랄까요. 어릴 적부터 학습되어온 무지에 대한 경계도가 이어지는 느낌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대학원은 그런 공간이 아닌 거 같아요. 새로운 것을 궁금해야 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아무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스스로 고민해보면, 저는 ‘사회’와 ‘사람’과 ‘산업’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공유 킥보드를 하나 타더라도, ‘킥보드 가격은 어떻게 정해질까’나 ‘수거하는 트럭의 동선은 어떻게 짤까?’ 등이 근본적으로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산업공학과를 전공하기로 했습니다. 전과할 거 같아요. 이게 마지막 선택이지 싶습니다. 이번엔 정말 열심히 찾아봤거든요. 산공과 친구들도 만나서 얘기도 해보고, ‘경영학 콘서트’,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라는 책도 읽으면서 제가 개별연구를 할 때 받은 이 느낌이 틀린게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최근에 초등학교 친구 - 카이스트 대학원생인 - 랑도 만나서 밥을 먹는데, ‘배우기 좋아하는 것’과 ‘새로운 걸 궁금해하는 것’의 차이도 본인이 느낀다고 해서 그 생각도 맞는 것 같고요.
물론 복수전공으로 뭘 할지 얘기하라면 잘 모르겠습니다. 전자를 할지 기경을 할지 저도 알 수가 없네요. 그냥 5년 반 다니고 전자, 기경 복수전공 두 개 다 할까 봐요 하핳. 솔직히 그래야 직성이 풀릴 거 같아요. 저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봐야 아는 성격이니까요.
본인의 좋아하는 분야를 업으로 삼아서 ‘워라밸’이 아닌 워크가 라이프가 되는 아티스트들을 동경한 저로서는 대학원이 지금은 2순위 옵션입니다. 대학원을 가도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에 가지 싶어요. 클라썸에서 일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데이터를 다루는 직업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SQL로 꽤 인사이트 넘치는 데이터를 많이 뽑았으니까요. 정형화되지 않은 자료들에서 인사이트들을 뽑아내는 것에 흥미를 느꼈어요. 이 때까지 해온 길도 헛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전산과로 꽤 많은 일들을 쌓았고, 모든게 꽤 잘못되게 흘러가더라도, 그저 개발자로 취업하면 됩니다. 저에게 든든한 4년치 AWS 크레딧도 있기 때문에 해보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습니다. 하하 그렇다고 컨설팅을 포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커리어 스텝이라는 컨설팅 관련 교육 업체가 있는데, 해당 업체에 등록된 멘토들의 출신 분야를 보면 공대 쪽에선 ‘산업 공학과’가 많거든요. 컨설팅과의 괴리도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아, 저로서는 오히려 잘 정렬되었다고 느껴지네요.
그래도 이 모든 생각이나 선택이 지나고 보면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저는 ‘후회’가 ‘게으른 선택’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번 결정은 한 달 간의 경험 + 스스로에 대한 고찰 + 책 2권 + 6명이 넘는 사람들과의 대화 + 각종 유튜브 조사 등으로 이루어진 결정이니까요. 이것보다 더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적어도 ‘게으른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